네 가족 잃고 43년…“살려고 잊었다”(경향신문)

작성자 : 518유족회

작성일 : 2023-05-18

조회수 : 905

5·18 당시 행방불명자 가족 김금희씨 

숨진 여동생 장례 참석 위해
무안 찾은 어머니·두 남동생
큰아들과 광주서 행방불명


"살려면 잊어야 한다.” 

강산이 네 번 넘게 변할 동안 이 말을 수천만 번쯤 되뇌었다. 가족 4명을 하루아침에 잃었지만 돌아오는 건 “가족을 팔아 보상금을 받으려 한다”는 손가락질이었다. 

그때마다 김금희씨(70)는 “모든 것을 포기할까” 여러 번 생각했다. 가슴속에 맺힌 한은 원인 모를 병이 됐고 고통의 나날이 이어졌다. 가족들은 당시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씨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어머니와 두 남동생, 어린 아들이 행방불명된 ‘행방불명자’ 가족이다. 정부로부터 5·18 당시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은 84명 중 일가족은 김씨 가족이 유일하다. 어머니 임소례씨(당시 57세), 남동생 김병균씨(23세), 막냇동생 김병대씨(14세), 다섯 살이었던 김씨의 아들 박광진군이다. 

지난 12일 전남 무안군의 한 마을에서 만난 김씨는 날이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 박병식씨(76)가 누워 있었다. 김씨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오고 있다. 

결혼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씨와 남편은 큰아들 광진군을 비롯해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뒀다. 가난했지만 그 시절 농촌 마을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부부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월. 김씨의 친정 식구들은 당시 고향 무안을 떠나 경기 고양군 벽제읍과 의정부시 등에서 살았다. 공장에 다니던 김씨의 막내 여동생이 병을 앓다 5월10일 숨지자 어머니와 두 남동생은 장례를 위해 무안으로 내려왔다. 

장례 이후 김씨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던 친정 식구들은 5월20일 경기도로 돌아가려고 무안 몽탄면 사창역에서 오전 10시30분 광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외삼촌을 유난히 따랐던 김씨의 큰아들 광진군도 함께였다. 당시 무안에서 경기도나 서울로 가려면 열차를 타고 광주역에 간 뒤, 인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는 게 일반적이었다. 광주에서 5월18일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김씨는 먼 길을 떠나는 가족들을 위해 달걀을 삶았다. 

5월20일 낮 “광주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은 김씨는 가족들이 모두 경기도로 잘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열흘쯤 뒤 경기도에 사는 친정 식구의 연락을 받은 김씨는 “도대체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이 그때까지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씨 일가족이 광주역에 도착할 무렵, 광주는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으로 시민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5월20일 오전에는 3공수여단이 열차를 이용해 광주역에 도착했다. 

김씨 가족이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역 인근과 이들이 버스를 타야 했던 고속버스터미널 주변에서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이어져 많은 시민들이 다치거나 행방불명되기 시작했다. 이날 밤에는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해 최소 4명이 숨졌다. 

김씨는 “아무리 군인들이 잔인하다고 한들 나이 든 어머니에 어린아이까지 4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씨는 수년 동안 가족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곧 “시신이라도 찾고 싶다”는 절망으로...(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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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과 5·18유족회는 김씨와 가족들을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5·18 때 동생을 잃은 박현옥씨는 “가족 한 명을 잃은 저도 아직까지 가슴이 먹먹한데 4명이나 시신을 찾지 못한 김씨의 심정은 오죽하겠느냐”며 “행불자는 반드시 찾아 가족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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