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518유족회
작성일 :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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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대 남성들이 광주 동구 금남로 옛전남도청 주변 항쟁탑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얼굴의 안색을 살피고 의사가 문진을 하는 것처럼 묻고 또 묻는다.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을 최후까지 지킨 기동타격대원들이다. 단 한번도 주인으로 행세하지 못한 이들이 45년전 광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항쟁의 주역들이다.당시 최연소 15세에서 최고령 33였던 이들의 머리위에는 어느덧 하얗게 세월이 앉았다.
지난 24일 45년전 옛전남도청을 최후까지 지킨 기동타격대 14명이 다시 역사의 현장에 섰다. 기동타격대 동지회가 파악한 45명 중 생존자 30명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다. 이들은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공격에 3명의 동지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26일 오후 3시 발대식을 갖고 죽음을 불사한 기동타격대원들에게 15시간만에 닥친 슬픔이었다. 계엄군에 체포된 이후 그들에게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렸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철모에 번호와 별명을 썼야 했던 이들은 죽어간 동지의 이름을 불러보지 못한 채 살아 남은 죄책감과 회한의 세월이었다.
5명의 3조원 중 살아남은 염동유씨는 "새벽 3시께 순찰을 마치고 도청 정문앞에 낮은 포복자세로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 같은 조 3명이 계엄군의 기습 사격에 눈앞에서 쓰러져 죽었다. 계엄군이 얼마나 총을 쐈됐든지 이마에 돌이 박혀 피가 줄줄 흘렀다. 체포돼 나갈때보니 도청앞 인근 나무 밑으로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염씨는 도청에서 계림동 광주시청으로 압송돼 등에 '극렬분자'라는 글씨를 붙이고 상무대 영창으로 갔다. 거기서 당한 고문은 지금 그를 괴롭히는 독소가 됐다. 고교생으로 4조였던 마삼훈 씨는 "새벽에 2층 민원실을 향한 총 난사에 누군가 쓰러져 신음하는 것을 보고 목화솜 이불 두 개를 덮어주고 지혈을 하고 있었는데, 계엄군의 기만에 밖으로 나오다 체포됐다. 훗날 그때 돌아가신 분이 윤상원 열사임을 알았다"고 울컥했다.
이들은 그들의 피가 스민 옛 전남도청 복원 현장과 인근의 전일빌딩 벽의 총탄 자국을 보고 감정을 진정시키는 모습이 역력했다. 245빌딩 10층 홍보 영상에서 '시민 여러분 우리 다죽습니다. 공수부대가 오늘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라'는 45년전 그날 밤 도청 상황실에서 들었던 그 여성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숨죽이며 홍보영상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가는 축축해졌다.
모두 내란죄를 받았던 이들은 5월의 전사로 거듭났다.행방불명자를 찾아내기 위해 암매장지도를 그렸고, 6·29선언의 결정적 역할을 한 6·10 항쟁의 투쟁 현장에서 전력을 다했다.
45년전 국가 폭력의 잔인성을 목격하고 저항한 이들은 지난해 12·3 비상계엄 선포라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들은 "느닷없는 계엄령에 45년전 악몽을 되살린 공포로 긴장감을 놓치 못했고, 만약 상황이 악화됐으면 45년전처럼 총을 잡는 것을 주저치 않았다"고 했다.
/이용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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