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아 우리 재학아… 네가 뿌린 불씨가 아직도 살아이씨야.”
5·18민주화운동의 횃불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됐고, 한강 작가의 문학은 진실을 세계로 전했다.
최근 광주 북구 신안동 자택에서 만난 김길자(84) 여사는 매일 아들 문재학(당시 17세) 열사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문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중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졌다. 광주상업고등학교(현 동성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문 열사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동호’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25일, 김 여사는 남편과 함께 전남도청을 찾았다. 전날부터 그곳에 머물던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도청 내부는 숨죽인 듯 조용했지만, 바깥에서는 군화 발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2층에 들어서자 친구 양창근(16·숭일고1)의 시신을 수습하던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창근이가 죽어갖고 드러누워부러 있어요. 관에 담지도 못하고 그란디, 어찐다요.”
김 여사는 집에 가자며 설득했지만, 문 열사는 친구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김 여사는 다시 도청을 찾았다. 전날보다 더 많은 군인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문 열사는 ‘학생들은 손 들고 나가면 괜찮다’며 남기를 고집했다. 그날 저녁 통금(오후 7시)이 지난 시간, 아들은 가족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었다.
“차편이 모두 끊겨서 당장은 못가겄네요… 일단 손 들고 나가 볼게요.”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은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시민군과 학생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쏟아지는 총탄 앞에 쓰러졌다. 문 열사의 이름은 열흘 뒤 전남일보에 실린 사망자 명단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
국가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문 열사의 시신을 망월동에 묻었다. 묘지에서 관도 없이 담요에 싸인 아들의 시신을 확인 했을 때, 김 여사는 무너졌다. “내 자식이 맞다”며 묘를 부여잡고 오열하던 기억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아들의 ‘폭도 누명’에 대한 죄책감도 평생 짊어졌다.
그러나 이제 김 여사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월의 희생이 민주주의 뿌리가 됐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도청에 남았던 이들 덕분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는 거지요. 그날의 교훈이 지난해 12·3 비상계엄 때 시민들을 광장으로 일으켜 세웠다고 믿어요. 5·18은 시민이 어떻게 연대하고 저항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김 여사는 최근 ‘문학의 힘’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남편 문건양 씨가 눈물로 읽던 한 권의 책 ‘소년이 온다’ 덕분이었다. 도청에 남은 소년들의 마지막을 세계에 알린 이 작품은 문재학 열사를 모델로 한 ‘동호’를 통해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히 전했다.
“한강 작가님이 우리 재학이를 기억해 주고, 그 아픔을 널리 알리니 너무 감사하지요. 평생 울부짖으며 5·18을 알리려 해도 안 되는 일을 소설 하나로 해냈잖아요. 이 책 덕분에 진실도 남았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김 여사는 책을 펼칠 때마다 아픔이 밀려와 덮기를 수백 번 했다. 남편은 밑줄을 긋고, 눈물 자국을 남기며 책을 읽었다. 지난해 11월, 그는 남편의 손때가 묻은 ‘소년이 온다’를 광주시에 기증했다. 이 책은 이제 5·18을 알리는 문학적 상징이 됐다.
김 여사는 5·18이 단순한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어갈 역사’라고 강조했다.
/정성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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