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518유족회
작성일 : 2023-12-20
조회수 : 819
◀앵커▶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재조명받고 있죠.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불과 5개월 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했습니다.
40년이 더 흘렀지만, 피해자 보상은 8차례에 걸쳐 더디게 진행 중입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한 1980년대, 신군부가 집권한 기간 동안으로 보상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은혜 기자입니다.
◀기자▶
1980년 5월 27일,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에 숨진 류동운 열사의 동생 류동인 씨.
이후 대구로 생활권을 옮겼는데, 끔찍한 탄압을 목격한 마음의 응어리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1985년 학생 운동을 하던 최윤영 씨 등과 함께 5·18 왜곡 보도를 하던 대구의 한 언론사에 화염병을 던졌다가 구속돼 2년여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류동인 5·18 왜곡 보도 언론사 방화▶
"보름 동안 조사받으면서 4박 5일 잠을 못 잤고 선배들과의 관계 이런 사건과의 관계를 추궁당하며 욕조에 물 틀어놓고 거기에 머리가 담기는... 그런 물고문도 당했고..."
1988년 11월에는 12·12를 주도한 전두환의 합천 생가가 불에 탔습니다.
5·18 폄훼, 5공 비리를 규탄한 대구의 대학생들이 주도했습니다.
◀남태우 전두환 합천 생가 방화▶
"대구·경북은 신군부를 다 지지할 것이라는 착각을 서울분들도 많이 하거든요. 저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저희가 이걸 알려야겠다는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후 정치적으로 개인사적으로 봐도 소위 말하는 대구·경북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들은 굉장히 고초가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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